Boryeon Choi - S.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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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백이 원문을 작성했다고 알려진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은 조선에서 여러번에 걸쳐 발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소재와 퇴계가 16세기에, 그리고 사미헌이 19세기 구한말에 숙흥야매잠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주해하였는데, 그 연대기적 순서는 다음과 같다.

『시경(詩經)』* 제2장 소아小雅의 《소완편小宛篇》(기원전 9세기)

→ 남당 진백(南塘陳柏)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송나라 宋朝)

→ 소재 노수신(蘇齋盧守愼)의 《숙흥야매잠주해夙興夜寐箴註解》(1551)

→ 퇴계 이황(退溪李滉) 《숙흥야매잠도夙興夜寐箴圖》(1568)

→ 율곡 이이(栗谷李珥) 《성학집요聖學輯要》(1575)

→ 사미헌 장복추(四未軒張福樞) 《숙흥야매잠집설夙興夜寐箴集說》(19세기)

《숙흥야매잠》을 조선에 최초로 소개한 이는 소재 노수신(1515~1590)이다. 그는 유배생활중인 1551년, 중국 송나라의 시인 진백의 《숙흥야매잠》을 분장分章 및 주해하여 《숙흥야매잠주해》의 초고를 완성하였다. 이후 하서 김인후와 퇴계 이황에게 보내어 질정을 받았고, 이황의 의견을 반영한 수정본이 선조 1년인 1568년에 왕명에 의해 교서관에서 간행되었다. 소재의 원고를 질정하는 과정에서 하서와 퇴계는 소재의 해석이 도가적이거나 불가적으로 변질될 것을 우려하였다. 이러한 우려들은 구체적으로 낮의 시간에 행하는 정례를 서술한 3장 <독서>, 해가 진 후의 생활을 기록한 6장 <석척>, 그리고 마지막으로 7장 <겸숙야>에서 기의 해석을 둘러싼 문제 제기로 나타난다.

이들은 표면적으로는 퇴계의 벽이단闢異端의 욕구, 그리고 유교적 인간의 행위자성에 대한 향내向內적 해석의 경향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용 철학으로써 유교의 운영 체제가 현재 우리가 미래라고 부르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시간성, 그리고 그로 인한 두려움의 내면화로 구성되어있다는 사실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아침부터 밤까지의 시간에 따른 하루의 정례를 도열한 《숙흥야매잠》에 등장하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합성은 이 문제에 접근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 《시경(詩經)》은 중국 최초의 시가집이다. 서주의 말기로부터 동주에 걸쳐(기원전 9세기 ~ 기원전 7세기) 완성된 시집으로 305편이 수록되어 있다. 공자가 문하의 제자를 교육할 때, 주나라 왕조의 정치적 형태와 민중의 수용 태도를 가르치고 문학·교육에 힘쓰기 위하여 편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1편의 고대 민요를 '풍(風)', '아(雅)', '송(頌)'의 3부로 나누어서 편집하였다. 그중 6편은 제명(題名)만 있을 뿐 어구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가사가 있는 것은 305편이다. '풍(風)'이라는 것은 각국의 여러 지역에서 수집된 160개의 민요를 모은 것이요, '아(雅)'라는 것은 연석(宴席)의 노래로, 다시 소아(小雅)와 대아(大雅)로 구분된다. 출처: 위키백과 “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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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는 20세에 생원, 진사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하다가 29세(1543년)에 초시, 회시, 전시에 모두 장원 급제하면서 관료가 되었지만 32세에 을사사화에 연루되면서 파직되고 나서 20년 넘게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가 다시 관직에 복직한 것은 54세에 이르러서다. 유배지의 생활 속에서 하루 일과를 정해진 정례에 따라 도열한다는 것은 비일상적이고 초월적인 목적을 지향하거나 교리적 엄밀함을 추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실천 윤리로서 경經의 추구이지 다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퇴계는 《숙흥야매잠》을 『성학십도聖學十圖』의 마지막 도로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이를 실용적인 하학下學을 넘어 이학理學의 차원으로 승격시키고자 했다. 그 과정은 《숙흥야매잠》에 언급되는 각 정례들에 대한 형이상학적 정당화 작업을 필요로 했는데, 그 과정에서 퇴계는 소재의 다원주의적 해석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퇴계가 보기에, 《숙흥야매잠》의 정례들은 사려를 완전히 단절하는 불가의 사경死敬과 달리 생각을 전일하게 하는 활경活敬으로써 유가의 정좌를 다채롭게 구현하도록 돕는 사용사 설명서로써 해석되어야 마땅했다. 그렇다고 해서 실천들이 억지로 조장助長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경으로부터 활경을, 활경으로부터 조장을 구분하는 문제에 관한 물음은 능동과 피동, 주와 객을 구분하는 행위자성의 개념으로는 제시되기 어렵다.

LX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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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밤의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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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는 「고자 상(告子上)」에서 밤과 새벽의 시간을 회복의 원천으로 지적하였다. 일체의 바깥 사물이 잠든 깊은 밤중이나 새벽의 전혀 잡념이 없는 순수한 마음가짐을 뜻하는 야기(夜氣), 그리고 다른 사물과 접촉하기 전 새벽의 맑은 정신을 뜻하는 평단지기(平旦之氣)는 「고자 상」의 여덟번째 장인 <야기장夜氣章>에 등장하는 주제다. <야기장>은 우산牛山에 얽힌 설화를 담고 있어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으로도 불리는데, 그 설화란 다음과 같다.

우산牛山의 나무가 일찍이 아름다웠는데 사람들이 매일 벌목하고 소와 양이 뜯어먹기 때문에 민둥산이 된 것처럼, 사람에게도 본래 인의仁義가 있지만 관리를 못하면 양심을 잃어버리게 되니 평단지기와 야기를 잘 간직하여야 한다*.

뒤이어 맹자는 “질곡하기를 반복하면 야기가 족히 보존되지 못하고, 야기가 충분히 보존되지 못한다면 금수와 거리가 멀지 않다”고 말한다. 그런데, 성현지학聖賢之學의 관점에서 이와 같은 기氣에 대한 맹자의 해석은 상당히 독특한 것이었다. 이는 기의 개념과 운용법이 이미 당대의 도교나 불교의 수양론의 주요한 부분이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있다.

사물과의 하나됨으로써 도道를 설파하는 도가적 해석도 문제였지만, 불가적 해석은 주객의 구분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 층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구분의 전도가 아니라 구분 자체를 무화하고 초월하는 불교의 관점은 ‘주'와 ‘객’ 각각을 알맞게 작동시키는 정명正名한 이름을 구성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이에 따라 성리학에서 ‘야기'란 하루를 종료하며 다음날이라는 미래를 기약하는 변증법적 도약보다는 ‘회복'과 ‘보존'의 관념에 더 많이 결부되게 되었다. 밤을 통해 회복시키는 야기의 메커니즘은 ‘귀향'의 테마를 중심으로 형이상학적으로 정당화 되었고, 과거는 언제나 현재와 합성적으로 공현존하게 되었다.

* 박석(2013). “맹자(孟子)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야기(夜氣)`의 명상적 의미”. 중국문학

+ 미술은 형이상학에 대해 근원적으로 이율배반이라는 생각, 해보신 적 있나요?

위 글은 2021년 4월경 들뢰즈의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에서 등장하는 유출론에 관한 대목을 숙흥야매잠에 접목하여 구상했던 것에서 시작한다. (현재는 증발한) a-proxy.site에 "유출론에 대한 소고 1"라는 제목으로 익명 기고하였던 그 글의 요지는 회복의 원천으로써 밤이 갖는 악마적 측면이 은폐된 결과 그것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유물론에 위장 전입하게 되었다는 가설이었다. 이후 소속 연구실 주관 세미나에서 "과거와 현재의 합성적 공현존"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할 기회가 있었다. 자발적으로 썼던 초고와 달리 강제된 것이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숙흥야매잠에 관한 연구서들을 살펴볼 기회가 되기는 했지만, 인용의 무맥락성과 동양 철학에 관한 이론적 엄밀성의 결여로 인해 여느 학회에 정식 투고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글의 주장을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얼버무려진 오늘과 내일의 경계(즉 시간의 순환)가 미래 개념을 불가능하게 한다-또는 다른 종류의 미래 개념을 요청한다. 그에 따라 귀신의 존재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으스스하기보다는 바람직한 일이 된다. 연구는 여기서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글에서 주장되는 바는 근거 없는 추정이라기보다는 구체적인 문헌들로부터 도출된 것이다. 이처럼 학회에 게재될 수 없지만 명백히 어떤 종류의 연구인 것들(i.e. 바보가 아닌 이들을 위한 체계적 비합리성)은 학술적으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만, 작가(e.g. 다른 소리를 해보려는 쥐들)에게는 유용할 수 있다. 제도와 예술학교는 위와 같은 논리에서 자유롭지도 못함에도 철저한 무관심으로 임하며, 이것은 우리 몫의 고통이 된다.

만들지 않으면서 말하는 것은 쉽고, 그건 내가 갈 수 있었던 길이 아니다. 앎, 그것을 어떻게 비평 나부랭이나 영감의 원천으로 소진시키지 않으면서 자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가? (이것은 새로움의 문제와는 별개의 사안이다.) 진동하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값을 알아서 조정해가며 영원히 젊을 것을 요구받기에, 무한한 상호 참조의 망 속에 흡반을 붙이고 세계의 비밀을 훌쩍훌쩍 들이마시고는 간신히 제 몫의 잠시-새로움에 기식하는 수 밖에는 없는 오늘날의 천덕꾸러기 예술가가 적어도 조금 덜 고통스러워지는 방법을 전수하는 새로운 학교가 필요하다. (결의가 아닌 포기가 공동체의 조건이라는 사실 너머에서.) / 202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