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현재의 합성적 공현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에 대한 고찰 

* <성학십도 VR>, 디지털 시공간으로 빚어낸 K-철학_ 발표 원고, 2021



愧屋漏爲無忝 불괴옥루첨(아무도 보지 않는 방 안에서도 부끄럽지 않으면, 하늘에 욕됨이 없다.) - ≪시경詩經≫ 대아大雅의 억편抑篇

莫見乎隱 莫顯乎微 막연호은 막연호미(숨겨진 것보다 잘 보이는 것은 없고, 미세한 것보다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 - ≪중용≫ 12장

유가의 향내적 경향은 내부 세계에 대한 가설적 시선을 상상함으로써 ‘내부의 외부'를 얻는다. 이 가설적 외부, 상상된 시선은 내 자신의 반성적 시선이 아니라 제 3자, 방 안의 숨겨진 시선이다. 예를 들어 ‘불괴옥루'의 ‘옥루’는 직역하면 ‘새는 지붕'을 뜻하나, 해석하기에는 방의 서북西北 귀퉁이, 즉 집 안에서 가장 깊숙하여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뜻한다. 이처럼 성학의 운영 체제 속에서 두려움과 삼감은 실제적이기보다는 가상적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성학의 수행자를 실제로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게 만든다는 점에서는 기능적이다. 이 두려움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기존재하는 내부로부터 상상적으로 불러일으켜지는 것이며, 이 두려움은 수행자로 하여금 특정한 행위 하기를 경계하고 삼가며 두려워하도록 한다. 하지 않음을 통한 행함이라는 측면에서, 두려움의 정동은 성학 운영 체제의 작동에 필수적이며, 이는 이 두려움의 실체성이 근본적으로 가상적인 이유와도 맞물려있다.

두려움을 발생시키는 원천이 미래보다는 과거에 근거하고 있다면, 귀신으로 현현하는 선현의 말씀은 그 정동의 원천이다. 이 두려움은 나를 해코지할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정설을 따르지 못함에서 오는 두려움으로, 이 내재적 두려움의 원천인 선조의 귀신은 순환적인 시간의 정례에 맞추어 잘 살아간다면 경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지금은 아직 얻지 못했지만 언젠가 돌아올 것을 안다는 의미에서의 현재는 언제나 과거를 한 번 경유한다. 미래의 언젠가 성취해낼 수 있는 유가의 '경'은 따라서 일반적인(시간의 화살) 미래 개념이 아닌, 다른 종류의 미래 개념을 통해 사유되어야 한다. 

이를 보다 자세히 살피기 위해서 우리는 두려움의 내재성 바깥에서 그것을 식별할 필요가 있다. 유가의 순환적이고 내재적인 시간에 인위적인 미래의 시점을 도입한다면, 유교적 주체로써 성인聖人과 성학의 운영 체제를 작동시키는 정동과 상상적 이미지의 문제를 과거와 현재의 합성적 공현존이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을는지 모른다. 거리를 둘 수 있게됨에 따라, 원형이정의 시간성을 작동시키는 유교의 예禮를 ‘이름 붙이기' 또는 ‘이름 부르기'를 넘어 강신술 또는 복원의 테크닉으로써 읽을 수 있게 된다.


가정법 미래 시제를 통한 가상적인 거리두기는 성학의 이론 자체를 확고한 자연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가설 또는 인공물로 취급하는 것, 특정한 방식으로 정렬된 당대의 사상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상황을 살펴보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숙흥야매잠》에서는 시간적 연접과 내속의 테마가 두드러지지기 때문에, 위와 같은 문제를 탐구하기에 적합하다. 《숙흥야매잠》은 아침에서 밤까지 하루의 정례를 시간순에 따라 도열했다는 점에서 근육 차원의 기억을 뜻하는 김나지움(gymnasium)으로써 성학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준다. 또한 구체적으로는 과거와 현재를 접붙이는 죽은 선생의 형상(e.g.夫子在坐 顔曾後先)이 등장하거나, 해석상의 모호함을 초래하는 부분(e.g.夜氣)이 언급되기도 한다. 


성리학을 다만 자연 원리가 아니라 인공적으로 구성된 인간 공학 시스템으로 취급한다면,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동안에 우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신체적 근육 차원의 기억과 지각을 식별할 수 있다. 이 식별은 인간 공학으로써 성리학이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이들에게조차 영향을 끼치는 바로 그 작동 방식을 식별할 수 있게 도울 것이다. 즉, 습관과 근육의 기억으로써 ‘이미 언제나 거기에 있는' 김나지움의 진정한 내재성을 지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20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