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형 백과사전의 리듬

* <눈에는 눈, 귀에는 귀> 세미나 원고



두려움이 사람을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이게끔 또는 움직이지 못하게끔 만들 수 있을거라는 생각에 낭만적인 구석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만인은 죽음을 통해 비로소 완전한 평등을 얻는다는 홉스의 정치인류학적 관점은 죽음 하나면 완전한 소멸이 가능하다고 본다는 점에서 비관적이기보다는 낙관적입니다. 반대로 죽음 뒤에도 죽지 않는 것, 죽음 이후에도 무엇이 존속한다고 할 때, 보통은 유한성의 극복이라는 긍적적인 측면이 강조되곤 하지만 사실은 죽음의 불가능성을 인지했다는 측면에서 비관적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살을 생각해보면, 그것은 죽음의 실패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합니다. 자살에 성공한다면 사라지는 대신 자살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남아있는 이들에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도적으로는 감소할지 모르나 결코 종결되지는 않는 고통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죽어서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을 비관해서가 아니라 엄청나게 낙관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오히려 우리의 믿음, 예를 들어, 죽음=절멸이라는 믿음이 다만 운좋게 형성된 것일 수 있다고 속삭이는 회의론자는, 모든 것이 다만 무로 돌아갈 뿐이라고 말하는 허무주의자보다도 오히려 자살을 방지하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사이클로노피디아』에서 죽음은 부패가 갖는 ‘비절멸적’인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거듭해서 다시 정의됩니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완전히 말소되거나, 파괴되거나, 근절될 수 없습니다. 죽음은 죽음을 배반하고 소멸을 유예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죽음으로써 무로 돌아가는 대신, ‘불완전연소’ 즉 절멸의 불가능성으로 빨려들어갑니다. 이러한 부패의 과정 속에서는 ‘사라질 역량’ 자체가 상실되기 때문에, 어떠한 창조도, 창세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 영구적인 것이 있다면 말소되지 않고 살아있게끔 유지하되 오직 “일탈과 탈선”을 통해서만 그렇게 하는 부패의 과정 뿐입니다. 역자 선생님께서 ‘물렁물렁함’이라고 옮겨주신, 부드럽고 우유부단한 용해 상태는 그러나 “자연의 비정형성과 부합”하는 것도 아닌데, 자연의 비정형성이란 결국 재활용과 구원으로 나아갈 것이고 그것은 부패의 본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소모라는 테마는 증여 또는 소모에 대한 바타유의 논의와 잘 맞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이클로노피디아』의 부패론은 “은밀한 부드러움: 부패의 건축과 정치에 대한 개론”에서 다시 쓰입니다. 죽음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기존의 전제는 유지하지만, 그 전제를 이용하여 이전에 부정했던 ‘창조’의 가능성을 시인합니다. 물론 죽음이 가능하다고 보거나, 재림과 같은 신학적 모티브를 사용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자는 묻습니다. 죽음이 도래할 수 없다면, 생존하는 객체는 결코 외재화될 수 없는가? 이 질문에 궁극적으로 외부를 생각할 수 없게 만드는 생기론도, 죽음을 통한 외부가 언제나 가능하다고 보는 이상향적 순진함도 답이 되지 못한다고 봅니다. 저자는 어떠한 방식으로도 거주하거나 기반할 수 없는 ‘현장 외(ex situ) 건축’을 위한 공간적 모델을 제안합니다. 요지는 부패는 일종의 ‘벡터 정렬’이라서, 부패하는 대상을 감산적인 방식으로 ‘구축’한다는 것입니다. 입장은 약간 바뀌었지만 여전히 네가레스타니가 사용하는 공학적이고 수학적인 표현들은 사실을 기술하는 동시에 허구를 구축하는데 유용한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이 글의 경우, 현장 외 건축은 ‘어떠한 방식으로도 기반하거나 거주할 수 없는 종류의 건축물’이라는 설명에서 공간화된 허구가 작동합니다. 


끊임없이 재협상되고 비틀리는 허구적 공간으로써 글쓰기는 ‘사이클로노피디아’라는 제목처럼 ‘사이클론’과 ‘백과사전’을 뒤섞는 방식으로만 쓰여질 수 있는 것일는지도 모릅니다. 사이클론쪽에 초점을 맞추면 백과사전에 구멍이 숭숭 뚫리고, 백과사전적 의지를 밀어붙이면 사이클론이 그 자체로 하나의 건축술로 안정화된다는 측면에서 양자간의 알력은 끝없이 지속됩니다. 그래서 네가레스타니가 다시 쓴 부패론은 사이클론의 건축술 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 바타유와 관련한 책들 중 이 두 키워드를 각자의 중심으로 삼아 진동하는 책은 각각 닉 랜드의 『절멸을 향한 갈증』과 드니 올리에의 『건축에 반하여』였습니다. 이 두 책의 리듬을 살펴보면, 저자들은 바타유에 대해 쓰기보다는 바타유와 더불어 씁니다. 반면 『비정형: 사용자 안내서』의 저자들에게 있어서 바타유는 큐레이션의 도구이기 때문에, 비로소 거리감을 두고 서술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는 알파벳 순서에 따른 표제어들로 구성되어있어, 리듬이 아니라 인덱스를 찾아 읽는 것이 편합니다.


여기서 알파벳 순서에 따른 표제어의 배열은 바타유가 『도큐망』에 기고한 「비평사전」을 따른 것인데, 단어의 선정 및 구성 자체는 지극히 자의적이고 불경하기 짝이 없습니다. 알랭 부아는 이러한 종류의 실천을 두고 사전적 형식이라는 책략을 효과적으로 채택하되, 사전을 하나의 큰 ‘꽥꽥’으로 기능할 수 있는 무례한 트림과 같은 말들의 모음집으로 만드는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알파벳 순서에 따른 자의성은 뭐라 정당화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으로 대체되었다. [...]「비평사전」의 첫 번째 글이 건축을 집중적으로 다뤘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건축에 대한 공격은 결국 인간에 대한 공격이기 때문에, 꼭 필수적이다’라고 바타유는 쓰고 있다.” 뒤이어 이 사전에서 ‘비정형’ 항목이 담당하는 역할에 대한 서술이 이어지는데, 예상하시는 그대로입니다. 비정형이 백과사전으로써 「비평사전」을 구성하는 주요한 구심점이라는 이야기이지요.


『비정형』에서 알랭 부아와 크라우스는 2차대전 전후의 앵포름(inform) 실천과 같이 바타유가 직접 기여했던 실천 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바타유와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던 그 이후의 20세기 예술사 전체까지도 개괄합니다. 실제로 내용들을 살펴보면 상당 부분 『1900년 이후의 미술사』의 확장된 서브 프로젝트로 읽히는데, 때로는 어떤 작가가 바타유를 염두에 두고 작업하지 않았더라도 기획의 키워드에 맞으면 다룹니다. 여기서 알랭 부아와 크라우스의 비평적 궤적 자체가 현대 미술 담론에서는 백과사전적 정전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정작 그 백과사전이 그 자체로 편파적 ‘리스트'로써 구성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다소간 논외로 치더라도 말입니다. 일례로 『비정형』은 1929년에서 30년 사이 단 1년간 발간되었을 뿐인 『도큐망』을 둘러싼 실천은 대단히 상세히 다루는 반면 10년 뒤의 아세팔 비밀결사나 사회학 학회의 실천에는 비교적 덜 관심을 가지는데 아마 저자들의 목표인 ‘모더니즘 예술의 조건’에 대한 코멘터리를 제공하기에 그다지 도움 되는 맥락이 없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럼에도, 『비정형』이 바타유를 분석의 목표가 아닌 도구로 삼고 있다는 점은 『비정형』의 미덕으로 느껴집니다. 심지어 저자들은 바타유의 ‘미적 한계’를 지적할 수 있기에 이르는데, 그 한계란 바로 구상주의, 즉 형태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했다는 혐의입니다. 그러한 지적은 타당한 것인데, 무두인 비밀 결사를 위해 앙드레 마송이 그린 드로잉만 보아도 그런 점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바타유가 건축을 인체에 비유하는 전통적인 은유를 넘어서지 못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 형태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은 타당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순은 “기획을 통한 기획의 탈출”이라는 그의 야심에는 잘 맞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기획이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관에 의거한 휴머니즘적 기획으로써 인간, 건축, 그리고 인간의 건축을 모두 포함하는 기획을 뜻합니다. 따라서 기획을 통한 기획의 탈출이란 곧 인간의 형상을 통해 바로 그 인간의 형상을 탈출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상성의 극대화를 통한 도상의 탈출, 은유를 허용할 바에야 차라리 모든 것을 은유적으로 착취하기.. 그 기획은 무한한 꽥꽥의 리듬으로 채워질 수 있겠지만, 저는 그곳에 갈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지식의 대성당을 구성하는 전서(Summae)-올리에가 목차와 개요로 구성되는 현재적인 ‘책'의 모델의 기원을 찾는-13세기의 스콜라주의도, 합리성을 통해 지식을 총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던 18세기의 계몽적 백과전서파도 없기 때문입니다. 꽥꽥거림과 잉크 얼룩으로 더럽힐 백과사전 자체가 부재합니다-혹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바타유의 은유에 대한 거부가 해체주의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익히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대로라면, 은유에 대한 거부 또한  ‘은유 없이 말하기'같은 제거적 실천보다는 모든 것을 은유로써 착취하는 방식으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건축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건축을 도매급으로 매도함에 따라, 역설적으로 건축적인 인간의 형상은 강화됩니다. 모든 머리가 참수를 필요로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참수는 머리를 필요로 합니다. 머리 없는 사람의 이미지는 이 세미나에서 맨 처음 이야기해보기를 제안드린 이미지입니다. 일차적으로 이 이미지는 죽음을 환기하지만, 따지고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무두인은 네가레스타니가 불가능하다고 본 어떤 ‘재활용 모델’에 가까워보입니다. 이 드로잉의 출처가 된 무두인 비밀결사(Secret Society of Acephalica)는 사회학 학회(College of Sociology)와 더불어 1936년에서 1939년까지 만 4년의 기간동안 유지되었습니다. 구성원들은 영지주의에 입각하여 암흑 주술과 인간 희생제의를 탐구하였으며, 죽는날까지 모임에 대한 정보를 거의 유출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은 당대에 횡행하던 파시즘과 공산주의 그리고 기독교를 세 머리를 가진(tricephale) 괴물로 칭하고, 사드와 키에르케가드 그리고 니체를 모범 삼아 “도덕적” 혁명을 추구하였다고 합니다. 


아래는 바타유가 앙드레 마송의 그림을 받고 썼다는 글입니다.


"죄를 선고받은 사람이 감옥에서 탈출 한 것처럼 인간이 머리로부터 도망쳤다. 그는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를 범죄를 금지하는 신이 아니라, 금지를 알지 못하는 존재로부터 발견한다. 나라는 존재의 너머에서, 나는 머리가 없어서 나를 웃게 만드는 존재를 만난다. 그것은 나를 두렵게 하는데 그는 순진함과 범죄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그는 왼손에 강철 무기를, 오른손에 성심(聖心)과 같이 타오르는 불꽃을 들고있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또한 신이 아니다. 그는 내가 아니라 나 이상이다. 그의 내장은 그가 나와 더불어 그 자신을 잃어버리고 또 나를 그 자신으로, 즉 괴물로써 발견하는 미로이다.”


무두인이 어째서 인간을 탈출하기 위해 인간을 강화하는 기획인가는 ‘플라마리옹 판화’와 연결하여 보면 한결 더 잘 이해됩니다. 이 저자 불명의 목판화는 19세기의 천문학자이자 SF 소설가이기도 했던 카미유 플라마리옹이 천문학에 관한 책 『대기권 : 일반기상학』에 수록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지금은 뉴에이지 풍의 오컬트 서적에서 종종 마주치는 이미지입니다. 이런 책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헤르메스주의라는 영지주의적 실천의 한 갈래를 만나게 되는데, 커뮤니케이션, 운반, 분산의 신인 헤르메스를 신화적 기원으로 갖습니다. 바타유가 ‘각각의 인간 안에 들어있는 동물은 재소자처럼 감금되어있다’고 썼을 때, 그것은 고대 후기에 집성된《코르푸스 헤르메티쿰》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영지주의적 전언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헤르메티쿰》의 7권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습니다.


“나는 너를 감고 있는 두루마기를 갈기갈기 찢어야 한다. (그 두루마기는) 무지의 헝겊이며, 악의 지주, 부패의 사슬, 암흑의 막사, 살아있는 죽음, 감각 있는 시체, 네가 운반하는 네 묘지, ...너는 이러한 원수들을 두루마기처럼 걸치고 있으며, 이 두루마기가 너를 질식시켜 네 눈이 상계를 보아 진리의 미를 관조할 수 없게 하고, 너를 함정에 빠뜨릴 원수의 악의를 알고도 미워할 수 없게 하여 너를 하계로 끌어내리는도다(『헤르메스 총서』 VII, 2-3) 


영지주의자들은 인간의 영혼이 “첫 아버지의 뜻에 따라 노예 상태로 전락”하고, “에온éon의 세계가 끝나기까지 형체를 가진 육신의 감옥에 감금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영지주의의 교리가 무두인 도상과 플라마리옹 목판화를 가로지르는 것이라고 할 때, 무두인의 도상은 육신의 감금으로부터 풀려나 ‘저 너머’의 세계로 인도된, 지상에서의 완전연소를 성취한 인간의 도상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무두인은 가장 이상적인 커뮤니케이션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가장 완벽한 커뮤니케이션으로 향하는 주체의 이동과 운반은 완전한 죽음, 즉 재활용 가능하고 승화 가능한 죽음입니다. 이런 종류의 죽음은 언제고 허구적으로만 가능할 것이므로 하나의 ‘불가능’입니다. 


 『사이클로노피디아』와 『절멸을 향한 갈증』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주체성을 보장하는 불연속성을 깨뜨림으로써 개인성, 자율성, 고립을 파괴하고, 존재가 무의미한 낭비의 공동체로 열리게끔 하는 상처내기-구멍뚫기를 뜻하는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이는 기본적으로는 불연속의 감각을 통해서만 보장되는 주체성을 죽음을 통해 강제로 연속시키는 바타유의 에로티즘 논의를 구성하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격렬한 죽음은 불연속적 존재에 파열을 초래한다. 침묵이 감돌고, 제사를 참관하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느끼는 것은 제물이 도달한 존재의 연속성이다.” 그러나 이때 연속성이란 합성적 정신을 통해 건축적으로 정렬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 지네 같은 것으로, 그야말로 무의미하게 낭비되는 연속체입니다. 이러한 과잉의 구축 과정에서는 오히려 구축의 감산적 측면에 주목하는 것이 더욱 생산적이라는 사실을 네가레스타니는 보여주는 것일까요?


반면 『건축에 반하여』에서 드니 올리에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건축이 어째서 불가능한 죽음을 표상할 수 밖에 없는가의 문제입니다. 맨 처음, 죽음은 일어나서도 보여져서도 안되기 때문에, 무덤과 피라미드와 기념비가 죽음을 대신하여 죽음의 자리에 대신 섭니다. 무덤은 죽음을 대신하여 죽음을 연기합니다. 죽음이 연속성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인 한에서, 건축은 연속성의 최대 적이 됩니다. 올리에는 제 3의 용어를 도입함으로써 합(synthesis)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 물질을 살아있는 상태로부터 육탈시킴으로써 관념론에 항복하는 것이라고 여겼던 바타유의 탈승화적 관점을 온당히 파악했습니다. 미셸 레리스의 다음 문장은 비변증법적 유물론, 저급 유물론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저급한 것을 하락한 상태로 유지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 어떤 것도 추하거나 혐오스럽다고 지나쳐버릴 수는 없다. 똥조차도 예쁘다.”


육탈 뒤에 남은 뼈대만이 부패를 견디고도 영속하는 것이라면, 건축이란 언제나 이러한 뼈대를 세우는 일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나 네가레스타니의 부패론에서 살펴보았듯 물질의 육탈, 풍화, 석화를 방해하는 축축하고 건조되지 않는 상태가 무한히 지속됩니다. 따라서 연속성은 다른 방식으로 상상되어야 합니다.


무두인 비밀결사에서 여러편의 논문을 발표했던 로저 카유아의 이야기 중 곤충 의태술에 관한 부분이 두 번째 힌트를 제공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국내에서 카유아는 주로 놀이 이론 또는 게임 이론과 관련하여 알려져 있는 탓에 그렇게까지 이질적인가 싶습니다만, 1930년대에 의태 행위가 그 자체 외에는 그 무엇도 목표로 하지 않는다는 발상, 즉 생존주의적 설명을 따르지 않는 동물행동학은 당시로써는 이례적일 뿐 아니라 반동적이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의태와 정신쇠약”에서 카유아는 다음과 같이 씁니다. “개인은 자신의 피부 경계를 파괴하고 다른 쪽의 감각을 차지한다. 그는 어떠한 공간의 관점이든지, 그 공간의 관점으로 자신을 보고자한다.[...] 그는 어떤 것과 유사한 것이 아니라, 그냥 유사한 것이 된다.” 곤충의 놀라운 의태술이 단지 생존만을 목표로 했을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다윈주의에 반박하는 초현실주의자의 도발이 시작됩니다. 


하지만 병참화된 의태술의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이것은 실로 많은 문제와 연결되어있습니다. 『사이클로노피디아』에서 제안하는 현대화되고 도시화된 타키야는 그러한 위장술에 관한 이야기로 읽힙니다. 테러리스트가 민간인과 식별 불가능한 연속체로 잠복하기 위해서는 이교도의 머리가 필요합니다.  타키야는 개체들간의 연속성을 죽음이 아닌 “이중의 배반”을 통해 선취합니다.


“현대적 타키야는 타인의 믿음과 실천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자신의 믿음을 은폐하고 그럼으로써 적들의 사회 전체가 진짜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에게 과민 반응하도록 유도하는 것으로 변형된다. [...]타키야 원칙과 지하드는 민간인을 모호한 동맹자로 만드는데, 이는 적보다 더 나쁜 것으로 밝혀진다.”


 그러나 네가레스타니는 주체를 타자 이미지의 반영물로써 정의하는 것을 교묘히 피해갑니다. 하나의 유기체에게 “타자는 이미 영구적이고 절단 불가능한 부분으로써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소통과 폭력의 등과 관계를 상정하는 바타유식 커뮤니케이션 모델은 계속해서 유지되는 것 같습니다. 대개 이런 커뮤니케이션을 묘사한다든지 하는 일 자체가 그야말로 하나의 폭력으로써 제시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실천 동력으로 전환하기 매우 곤란한 부분이 있습니다. 제가 ‘허구를 증폭할 필요성’에 진심으로 동감한 것은, 이러한 상황, 그러니까 재현의 폭력 또는 폭력의 재현 문제를 맴도는 상황에 대한 모종의 돌파구로써 가능하지 않은가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즈음에서 이야기를 역자님이 말씀하신 "공포 소설의 효용”으로 옮겨보려고 합니다. 러브크래프티언들은 개연성을 찾는 인간을 조소하길 좋아하지만, 이것은 한 쪽에서 비개연적이고 초현실적인 것이 다른 한 쪽에서는 지극히 개연적이고 현실적일 수 있는 문제와는 조금 다를 것 같습니다. 사라 케인의 잔혹극 『폭파』가 로열 코트에서 처음 상연되었을 때, 비평가들이 극의 끔찍하고 공포스러운 면보다는 극이 비일관되고 비개연적이라는 식으로 비난했다고 합니다. 저는 『사이클로노피디아』의 역자 후기에서 인용된 조애나 러스의 공포론이 다음과 같은 조건부 문장으로 구성되어있는 것이 인상깊었습니다. “내가 페미니스트나 성소수자 활동가가 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세상이 있다면 나는 그곳에서 러브크래프트 이야기를 하며 여생을 살고 싶다.” 


제한된 시간이 주어진 극장, 즉 대부분의 커뮤니케이션 상연 장소에서, 내부를 외부화하기 위해 극장과 관객을 ‘폭파’하는 것은 유서 깊은 방법입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폭파되었다면, 즉 진정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졌다면, 이는 모리스 블랑쇼가 회상하는 무두인 비밀 결사가 그랬듯이 하나의 '불가능한 공동체’일 텐데요. 가능하고 또 기능하는 공동체의 모델이 부재할 때, 불가능은 어떤 황홀경으로 상상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너무 더럽고 추악해서 비밀에 부쳐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상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상상하고 싶지 않아서 불가능한 공동체일 수 있습니다. 


활동가가 될 필요가 없다면 그런 추악한 불가능의 공동체를 상상하거나 나아가 부분적으로 구현하는 과업을 수행할 수 있겠지만, 현실의 추악함 앞에서 불가능이란 합리성의 폭파가 아니라 기본적인 합리성이 통용되는 세계 그 자체가 됩니다. 나는 나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합리적 세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속으로는 그것이 폭파되기를 바라는 음험한 생각을 품고 살아갑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우유부단함의 오솔길을 에세이적으로 되새김질 해보다가, 폭파되기를 바라며 잠행술을 펼치다가, 운 좋게 잘못 표면화될 요행을 바라다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갑니다. 이것이 우유부단한 미로, 비정형 백과사전의 건축술일는지 모릅니다.


백과사전을 쓰고 있는 이는 사전의 바깥에 있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이발사의 역설같은 것일까요? 부패론을 다시 쓴 이후의 네가레스타니는 죽음의 불가능성 그 자체를 이용하여 구축과 설계를 시작합니다. 그는 죽음 이후에도 남는 것을 ‘무한히 0에 가까워 지지만 효과적으로 0이되지 않는 무한소적 지속’의 관점에서 최대한 세세하게 묘사합니다. 그는 바타유가 추구했던 이질성이 매 번 다른 것으로 위장된 동일성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대적 위장의 조건 속에서 바타유의 연속성이란 잘해봐야 ‘창녀’의 존재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증여론, 그리고 동물 존재에 관한 인간형태중심적 전제들에 기반해있기 때문에 현재의 우리에게 아무짝에 쓸모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전제들이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어 잔존하고 있는가, 그리고 기저의 논리를 어떻게 ‘무례하게’ 재활용할 수 있을까 입니다. 


지금까지 이야기나눈 『비정형』이 전시 도록으로 발간된 책이니만큼, 마지막으로 T 항목의 “역구멍(Threshhole)에 등장하는 두 명의 미술가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비정형』 전반에 걸쳐, 알랭 부아는 소위 장소 특정적 대지 미술로 알려진 로버트 스미스슨과 35세에 요절한 고든 마타 클락에게 있어서 건축의 문제가 지녔던 경중을 비교합니다. 요지는 스미스슨이 건축이 발생시키는 엔트로피를 다루기 위해 엔트로피를 생성했다면, 클락은 건축 자체를 쓰레기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건축학과 학생이었던 클락은 스미스슨을 흉내내는 것으로부터 작품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클락은 스미스슨과 달리 건축을 전공한 이로써 건축에 ‘정산해야 할 청구서’가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에 대한 그의 관심은 스미스슨처럼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스미스슨의 작업에서 감지되는, 사적인 남학생의 농담 같은 것을 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종류의 미봉책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클락은 폐기된 건물에 구멍을 뚫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보기에, 경매에 부쳐진 경제적으로 무용한 토지들은 구멍을 뚫을 필요도 없이 이미 그 자체로 구멍이었으며, 폐물은 그 자체로 건물이었습니다. / 2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