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미친 티 파티

≪Pity Forty Party≫, 최주원, 2019.12.6-29, 쇼앤텔 리뷰



디지털 환경에서 매끄러운 백터 객체를 만드는 것은 한 두 번의 클릭으로 되는 쉬운 일이지만, 거기에 균일하지 않은 표면을 부여하려면 ‘수작업’의 영역으로 선회하는 고된 노동이 시작된다. 반대로, 울퉁불퉁한 표면은 ‘수제’로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현실적인’ 질감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것이 깔끔하기를 바라는 상황에서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불만을 가진 경험이 있다. 벽면 부착형 가전제품이지만 동봉된 나사로 고정하는 것만으로는 왠지 불안하여 기어이 가장자리를 실리콘으로 메울 때, 수정된 글씨가 출력된 부분 시트지가 기존 글자의 크기 및 배경색과 미묘하게 다를 때 느껴지는, 뻐근한 이물감. 이곳에서는 자국 없이 매끈하게 만드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한 세계에서는 자연을 닮은 임의적인 표면을 만들어 내는 것이, 다른 세계에서는 최대한 매끈하게 뽑아내는 것이 매체에 대한 숙련도를 나타낸다. 어떤 기술의 적정성이란 이렇듯 상황에 따라 상대적이며, 그 의미도 한 곳에 고정되어있지 않다. 마치 느리다/빠르다, 밝다/어둡다는 표현이 고정된 상태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듯이 말이다. 차라리 어떤 것의 의미란, 날짜와 계절같이 순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 우리의 정서적인 측면에 적용하여 생각해보면 어떨까?

몇 해 전 작가는 ‘행복을 강하게 느낌으로써 결핍도 더 강해진다. 왜일까 생각하면, 이 행복을 오래 지속시키고 싶기 때문이겠지’라고 쓴 적이 있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노력하면 가까워질 것이라는 약속을 담보로 하는 견디는 마음일까? 아니면, 마침내 내 것이라 여겨지는 것을 소유하는 데서 오는 애착심일까? 우리는 행복을 오래 지속시키기 위해 어떤 일을 할까?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행복 비슷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 몰두하는 몇몇 건강하지 못한 습관들을 제외하면, 정말로 즐거운 기분이란 참 드물게 찾아오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어쩌면 행복이란 그 의미를 언제나 사후적으로 발견할 수밖에 없기에, 아직 오지 않은 것과 이미 지나가 버린 것 두 가지 사이의 비어있는 공기 중을 희박하게 떠돌고 있는 ‘나중에’의 약속일는지도 모른다. 그 ‘나중’의 시간은 수 없는 대패질을 통해, 까스러운 거스러미가 완벽하게 제거된 상태다. <Pity Forty Party>는 오늘도, 이번에도, 올해도 미룰뻔했던 예의 ‘나중’을, 그 자신이 벌일 수 있는 가장 부드럽고 푹신한 파티의 시간을 빌어 가져온다. 다만 이 파티는 일 년에 하루뿐인 생일을 제외한 모든 날의 생일 아님(un-birthday)을 축하하며 흥청망청 먹고 마시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미친 다과회와는 사뭇 다른 검약과 긴축의 감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감각은 대개 공간과 크기 문제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입구 좌측에 놓인 <머릿수 채우러 왔습니다~>는 두툼한 몸체에 어울리지 않는 가녀린 팽이버섯들이 머리 부분을 이루고 있다. 광대버섯의 알록달록함이 인도하는 즉각적인 유포리아 대신, 묵묵히 하루의 끼니를 책임지는 된장찌개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팽이버섯은, 수백 가닥이 모여 다발을 이루어야 셈이 가능하다. 이 다발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약속의 다발, 혹은 유보된 행복에의 약속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Pity For Tea Party>에 놓인 일련의 미니 조각들은, ‘한입 크기의 풍미있는 전체’인 쁘띠푸르(Petit four)처럼, 본식을 즐기기에 앞서 입맛을 돋우는, 지연된 실현 가능성의 다발이기도 하다. 네모가 찍히는 ‘동그란 도장’, 기네스에 등재된 ‘세계 최대 크기의 귀지’, ‘게살바르자’라는 문구가 새겨진 미니 비석 등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때 본식은, 현재의 곤경을 버티게 하는 환상적인 약속의 이미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파티가 오로지 케이터링으로만 차있다는 것을 알며, 가난한 미술가에게 케이터링이란 때때로 그것때문에 전시의 오프닝을 기다리게 되는 반갑고 즐거운 일이라는 점도 알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가 ‘잔인한 낙관’이라 칭했던 환상의 작동과 생존 도모 방식이 단순히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그것이 과정에 대한 애착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먹는 행위는 사람이나 페티시에 기대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는 점이다.

그 와중에 전시장 안팎에 정적으로 놓이거나 걸려있는 기린의 형상은 사뭇 유령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냥 기린 그림>의 원형 캔버스 속 기린은 마치 영정사진처럼 아래로 갈수록 희미해지고, 전시 공간의 바닥부터 천장까지 꽉 채우고 있는 <큰 기린>의 머리 부분은 전시 공간을 가로지르는 천정의 돌출부 뒤쪽에 가려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린은, 몇 해 전 마흔 살이 된 작가의 동료를 놀리는 이름이기도 하지만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 어쨌든 기린은 그 자체로 전시장에 앉아있기에는 키가 너무 크거나, 너무 과묵하다. 기린이 40세가 넘은 경우, 그는 첫 개인전을 치르기 위해 서울문화재단의 ‘최초예술지원’ 공모에 지원할 수 없다. 이를 놀리듯,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마주하는 <성년부중래(盛年不重來)>에는 ‘젊은 날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도연명의 시구가 음각되어있다. 언뜻 나무처럼 보이는 질감은 브라우니이고, 프로스팅은 석고 반죽으로 표현한 케이크 조각이다. ‘게살바르자’와 더불어 각각 나무 현판과 석제 비석이라는 한국의 버내큘러한 기념비 형식을 전유하고 있는 두 작품은, 박정희 독재 정권 시절 결성된 관변단체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가 전국 곳곳에 세운 표석의 문구 못지않은 헛헛함을 건넨다. 이 ‘바르게 살자’라는 지난 세기의 표어는 동시에 ‘빠르게 살자’이기도 해서, 이 표석이 세워진 곳은 목적지를 향해 직선 방향으로 질주하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구간임을 상기시킨다. 다른 방향은 없음.

그런 점에서 ‘케이크 산을 안에서부터 파먹어 들어가 결국 정상에 이르는 파티’를 위한 일종의 무대로 제작된 <Cake for>의 기이한 구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윗부분은 크림 장식이 되어있는 일반적인 케이크이지만, 중간의 기둥 부분이 길어 전망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양쪽에 부착된 두 점의 드로잉은 각각 케이크 굴을 파먹어 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마침내 촛불로 환히 밝혀진 케이크 타워의 정상에 이르러 환호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관객이 첫 번째 드로잉을 보고, 마치 석탄을 채굴하는 인부들의 모습을 닮았다고 느낄 때, 관객은 작가가 안내하는 심상으로 무사히 안착한다. 그 드로잉은 실제로 광부의 이미지를 참조하여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 매립된 파먹기 행위의 위아래 움직임과 대조적으로, <Dancer>는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채로 수평적인 회전 동작을 반복한다. 전시 기간 뒷바퀴가 마모되면서 바닥에 검은 동그라미를 남긴 채 속도가 저하된 <Dancer>는 <Cake for>와 더불어, 그러나 약간 다른 방식으로 속도의 문제에 대한 함의를 지닌다. 후자가 “자신이 먹어치운 세계, 혹은 자신을 먹어치운 세계”에 대한 ‘상부 채굴’로, 시작 지점이 이미 목표 지점이라는 점에서 측정되기를 거부하는 귀납적인 속도라면, 전자의 “느린 죽음”은 오직 스스로 지닌 동력만큼만 나아갈 수 있고 요행 따위는 바랄 수 없기에, 온 힘을 다해 (그것이 비참할 만큼 느릴지라도) ‘빠르게 살’ 수 밖에 없는 현실의 속도다.

이 현실은 굴곡져 있기에, 그 위에서 달리는 시속은 시시각각 달라지고, 당연히 측정 가능성이라는 ‘바르게 사는 삶’의 지표에 들어맞지도 않는다. 최주원은 그 울퉁불퉁한 표면 위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바퀴를 굴려 전진하며 그 동력으로 양꼬치를 구워먹는 <양꼬치를 향한 질주> 같은 것을 기획한다. 또는 흰 면천이나 콩주머니 대신 진짜 크림이 질퍽이는 ‘거대한 케이크 위에서 벌이는 생일잔치’를. 우레탄 폼처럼 부풀어 오르는 농담들을 락앤락에 담아 잘 간직하다가, 멈칫거리는 <Cat Cater>의 고양이 손을 빌어 정성스레 차려놓는다. 약간의 털이 묻어있을 수도 있지만, 잘 골라내고 먹으면 될 일이다. / 2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