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된 세계

* ≪OO하여 광명찾자!≫, 김혜연·최희정, 갤러리175, 2020.1.31-2.11 전시 리뷰



미친 사람이 곧 제정신이고, 제정신인 사람은 미친 사람인 세계를 상상해보자. 그곳에서는 병든 사람이 아픈 걸 숨기지 못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고, 사기꾼이 덕망 높은 위인으로 받들어진다. 육식을 위한 고의적인 가축 살해를 금지하자, 고기가 먹고 싶은 사람들은 돼지, 소, 닭이 자살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한다. 이것은 사뮤엘 버틀러가 상상한 가상의 문명으로, 시민들이 기계 문명을 스스로 삭제한 채 부조리의 정언을 따라 살아가는 ‘에레혼(Erehwon)’에 대한 이야기다.1 이곳은 여러가지 터무니없는 금지로 지탱된다. 예컨대 “에레혼에서는 어떤 사람이 몇 분간이라도 자신의 폐에 공기를 채우지 않고 버티는 상황을 엄격하게 금지한다.”2 이 문장만 보고는 발을 헛디뎌 익사하는 것을 금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선택해서 물에 빠져 죽는 것을 금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이 금지는 인간의 자율성을 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한편,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다는 것은 진정 자유로움을 의미할까?

다시 괴상한 금지가 난무하는 부조리한 세계로 돌아와 보자. 이곳은 김혜연이 제시한 <공기케이크>3의 규칙을 따라야만 하는 곳이다. 공기를 모두가 필요로 하지만 모두가 가질 수 없는 한정 자원이기에, 한 번에 한 사람만 숨을 쉬어야 한다는 규칙을 따라야 하는 곳.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극한의 상황을 겪어나가는 와중에, 이기적인 이는 이기심 때문에, 이타적인 이는 그 이타심 때문에 각기 죽음을 맞이하는 밀실 공포 영화의 극단적으로 온건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도 <공기케이크>는 TEOTWAWKI(우리가 알던 세계의 종말)에 대한 하나의 시나리오를 제공하는 허구일 따름이다. 그곳은 허겁지겁 스스로에게 매몰되는 들숨을, 뜨뜻한 배려의 날숨으로 쫓아내는 곳이다. 이와 달리 <숨만 쉬는 방>은, 허구가 아닌 현실이다. 혹은 스스로 현실이 된 허구다. ‘잠만 자는 방’이라는 매물 홍보 문구에서 착안한 이 ‘숨만 쉬는 방’이라는 제목은, 그래서 모순적이다. 그곳은 숨 막히는 곳, 내 몫을 다 내쉬고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돌아가며 숨을 쉬는 케이크 위의 공상적 유토피아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몫까지 상납해서 미처 창출하지 못한 교환 가치를 대불하는 곳이다. ‘잠만 잘 사람’을 구하는 도처에 널린 문어발식 전단지는 이런 사실을 함구한다.

동시에 <숨만 쉬는 방>은 가부장제의 딸이 체화하는 ‘눈치보기’에 대한 알레고리로, <잠만 자는 방>은 주인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숨죽이는 여성의 수행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러한 묘사는 어느덧 이음매가 꼼꼼하게 절연 마감되어, 안정적으로 의미를 유통하는 닫힌 회로로 기능한다. 이 회로 속에서, 구체적인 예들을 생생하게 나열해보는 일은 언제나 해방적인 동시에 외상적이다. 말문은 터지는 동시에 고갈된다. 의뭉스러웠던 기억들을 억압이라는 낱말을 경유하여 바라봄으로써 제정신은 유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는 차력에 가까운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무엇보다 그 기억들은 널 잘 안다는 이유로 매번 비동의로 갱신되는 사랑과 모순과 패배의 느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때문에 수없이 일으켜 세운 마음이 뒤엉킨 하나의 복잡한 실타래로 존재한다는 사실, 그 복잡성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그 실타래의 크기는 크지 않지만, 참으로 다채로운데, 단단한 곳과 누르면 움푹 들어가는 부분, 우둘투둘한 구간과 매끄러운 곳이 공존한다. 언어가 이 복잡다단함을 유형화하여 부분적으로만 포착할 뿐이라는 사실은, 언어의 강점인 동시에 약점이다.

그래서 <숨만 쉬는 방>은 작가의 어머니와 할머니라는 구체적인 행위자를 등장시키되, 김혜연의 이전 퍼포먼스 작업들이 그랬듯 이들에게서 말을 가로챈다. 이번에는 이들의 손에 종이를 쥐여주고, 전하고 싶은 말의 모양대로 찢어보기를 요청한다. 긴 부분을 따라 잘고 가늘게 찢어 다발을 만들거나, 가운데부터 찢어나가 다변체의 조각들을 만드는 이들 손의 안무로부터 어떤 지시를 읽어내는 것은 어렵다. 마치 옛이야기가 구전을 거듭하며 묘사와 내용은 탈각 되고 형식만 남기듯, 영상 속 인물들의 움직임에서 구체적인 통사들은 휘발되어있기 때문이다. 혹은 찢겨나갔기 때문이다. 세 점의 토템 연작도 마찬가지다. ‘노력해보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와 같은 제목을 단 드로잉들은, 노력할 수도, 최선을 다할 수도 없을 것 같을 때 꺼내는 비상 매뉴얼이다. 이런저런 종류의 절박한 소망과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을 한 데 욱여넣어, 문드러진 토템의 얼굴에 대고 합동 기원을 올리는 것은, 추상화, 그러니까 형식화라는 마지막 보루에 기대는 일이기도 하다.

앞서 제정신을 유지하는 일에 대해 얘기했다. 에레혼과 같이 거꾸로 된 세계에서는, 미친 사람이 제정신이고 제정신인 사람은 미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일이기도 하다. 매일 아침 ’여성의 죽음이 엔터테인먼트처럼 소비되는’ 새롭고도 새롭지 않은 기사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금지되어있지만, 누군가를 죽도록 내버려두는 일은 괜찮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한다. 이런 뉴스 기사와 함께 하루를 시작하는 이에게, 제정신인 상태란 꼭지가 돌아버린 상태뿐이다. 최희정의 <Mad woman’s drawing message>는 사실 제정신인 여자의 메시지인 이유이다. 사정은 다음과 같다. 꼭지가 돌아버린 한 여성에게, ‘웃어’라는 문장이 입력된다. 이 문장은 원래 매끈하게 드리워진 검은 울 재질의 실 커튼 위에 보일락 말락 하게 쓰여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쓰인 것이 아니고, ‘웃어’라는 글자에 맞추어 실을 얽은 것이다.4 이는 아마 언젠가 찰랑이는 긴 머릿결을 빗어 내리다가, 아프게 걸렸던 문장이었으리라.

이렇듯 여러 가지 (분)위기가 뒤엉킨 실타래를 뜨겁게 달군 빗으로 유순하게 만들 것인가, 칼로 내려칠 것인가의 기로에서, 흐트러진 검은 실과 내던져진 이발 가운으로 구성된 <영광 없는 과거에 안녕>은 후자를 택한다. 작가는 이를 파란 약과 빨간 약 중 끝까지 가는 약을 선택하는 행위에 빗대기도 했다. 머무르는 약을 택하는 것은 ‘여성성이라는 사회적으로 구성된 가치를 학습하여, 이를 자신의 기호와 취향으로 내면화’5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그런데, 여기서 다시금 선택의 문제가 불거진다. 흑인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의 “주인의 도구로는 주인의 집을 무너뜨릴 수 없다”6는 저명한 투쟁 문구를 떠올려보자. 만일 주인의 집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이 자명하지만, 지니고 있는 것이 주인의 도구뿐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가속주의자는 이러한 출구 없는 복잡성 안에서 가용 가능한 전략으로 ‘즉흥적이고 시의 적절한 길잡이’로써의 ‘교활한 책략(cunning craft)’7을 제시한다. 여기서 복잡성이란 간단히 말해, 웃고 싶지 않지만 웃어야 하는 상황이다.

웃는다는 것이 때때로 생계나 안전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것. 말도 안 되는 말 같지만, 거꾸로 된 세계에서는 누군가의 기분이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일이 빈번하다. 이 거꾸로 된 세계는 동시에 오래된 세계, 에레혼의 사람들이 이성의 기계를 때려 부수고 굳이 돌아간 비이성의 세계다. 이 세계 속에서 상식으로 여겨지는 것을 속 편하게 향유할 수도, 시스템의 바깥으로 탈주할 수도 없는, 출구 없는 상황에서, 일종의 임시방편으로, 그러니까 일종의 교활한 도구로써 최희정은 자원의 낭비를 최소화하는 합리적 기계 얼굴을 만든다. 명령어 앞에 슬쩍 조건문(if)을 붙여, 다가갈 때만 출력되는 눈부신 ‘^^’는 ‘안전을 위한 쿠션 얼굴’이다. ‘억지로 웃고 있음’이라는 괄호가 붙은 이 ‘^^’의 어디선가, ‘이를 갈고 있는듯한 환청’8이 들린다. 역설적으로 <방패막이>는 그 작동 원리를 알고 난 사람에게, 건드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건넨다. 검은 나일론 실로 자수한 <Fakes!>는 이 작동문 뒤에 두 개의 슬래시(//)9를 치고 작성된 주석으로, 기계의 작동에는 관여하지 않지만 보는 이는 이를 참고하여 그 구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이즈음 되면 전시 제목인 ‘OO 하여 광명 찾자’의 빈칸에 들어가는 단어를 대강 유추해볼 수 있게 된다. (자수, 탈코, ^^ 등등.) 그러나 실제로 두 작가는 OO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녹록지 않다는 점을 알고 있다. 이러한 곤경의 상황에서 일시적이고 즉흥적인 버티기 전략은, 마비와 마모로부터 주체를 보호한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부드러움에 대한 감각이다. 이전에 김혜연은 <Pillow talk>(2016)와 <푹신푹신 준비운동>(2018)을 통해, 그리고 최희정은 <The silky person>(2019)와 <산책자들>(2018)을 통해 푹신푹신함과 북슬북슬함이라는 촉각적 심상을 다루었다. 이 심상은 사유지와 공유지, 소통과 착각, 이해와 오해 중 하나로 수렴하지 않는, 둘 사이 어딘가의 중층 지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예컨대 ‘쿠션어’를 사용하는 것이 권력관계 속에서 낮은 곳에 위치한 스스로를 보호하는 전략인지, 어여쁨을 받고 싶은 욕망에서 오는 것인지10 구분할 수 없고, 때로 그 구분이 무용한 것으로 밝혀지는 것처럼. ‘양’성 평등을 포기하지 못하는 ‘양’성평등 위원회지만, 그 존재 때문에 결국 예기치 못한 순간에 어떤 고리타분한 인식이 바뀌는 것처럼. 그 미결정의 지대를 탐색하는 방법의 하나로, 허구적인 것을 폭로하기에 앞서 그것이 현실에 침투한 양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김혜연과 최희정의 작품을 그 작업의 과정으로 읽어보자. / 2020.3


참고

1. 에레혼, 사뮤엘 버틀러, 한은경 역, 김영사, 2018.

2. 같은 책, p. 180.

3. ≪공기케이크≫(김혜연, 양주시립미술창작스튜디오, 2018.8.7-19) 중 <공기케이크>, 2채널 비디오, 6:10, 2018.

4. ≪적당히 하거나 못하거나 안하거나≫(최윤정·최희정, 공간 형, 2019.5.1-31) 중 <웃어>, 최희정, 검은 실, 가변설치, 2019.

5. 작가 노트에서 인용.

6. “The master's tools will never dismantle the master's house.”, Audre Lorde, 1979.

7. “Escape Velocities”, Alex Williams, e-flux Journal #46, 2013.

8. 본 전시의 <교환일기>에서 인용.

9. C언어에서 프로그램 실행에 영향을 주지 않는 주석 처리.

10. 본 전시의 <교환일기>에서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