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청각추론: 잘못 듣는 일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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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잘못 듣는 일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둘러싼 믿음은 언제든 틀릴 수 있다’. 이 가정은 눈으로 확인 가능한 것을 참의 증거로 최종 채택하는 시각중심적 증거론에서 당연하게 가지고 있는 하나의 가설이다. 만약 간밤에 창밖에서 들려온 소리가 평소와 달리 유난히 으스스했다면, 우리는 날이 밝은 뒤 그 소리의 근원을 추적하기 위해 바깥을 살펴볼 것이다. 그 소리에 대해 가졌던 음산한 상상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그 소리는 별로 으스스하지 않은 무언가의 마찰음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안도한다. 


이 글은 어떤 소리를 다른 소리로 잘못 듣는 그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러한 듣기에서의 오인이 무엇을 행할 수 있을지 생각해본다. 이를 위해 어떤 음향적 사태를 설명하는 여러 가설 중 하나의 가설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을 ‘최선 청각 추론’이라 이름 붙였다. 최선 청각 추론은 대개 이러이러한 상황이라면 저러저러할 것이라는, 사태의 그럴듯함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이 믿음을 지탱하는 것은 주관적인 합리성으로, 이 합리성은 때로 청취자가 이미 가지고 있던 믿음의 강도에 따라 한 소리를 다른 소리로 듣도록 한다. 다른 소리에 대한 믿음은 선택하는 것이기보다 강제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에 잘못 듣는 일이 지니는 가능성의 핵심이 있다. 그것은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상상함으로써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듣기의 문제에 대한 이같은 접근은 증언적 믿음의 동인을 다름 아닌 실용적인 계기에서 찾도록 하는데, 이는 증언의 청취를 일종의 윤리적인 책무로 여기는 일반적인 접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에 도움을 준다. 


이제, 앞선 가정을 다음과 같이 고쳐 써보자: ‘소리를 통한 앎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보는 일만큼이나 믿을만하지 않다’. 야간에 일어난 뺑소니 사건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을 참작할 때 가스등의 노란 불빛 아래서 파란색 택시가 녹색으로 보였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듯, 소리를 통한 앎에도 언제나 다르게 들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요컨대, 듣기를 통한 앎은 어둠 속에서 보는 일처럼, 때로는 그보다 더욱 심하게 사태를 오인하게 할 가능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과 달리, 들리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봄을 통한 앎이라고 해서 언제나 믿을 만한 것은 아니다. 지각은 종종 사태의 그럴듯함을 너무도 강력하게 믿는 나머지, 보이는 것을 부정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지과학의 실험이나 행동경제학의 사례들은 인간 지각이 얼마나 비합리적인지 폭로하며, 나아가 그러한 비합리성이 특정한 조건 아래서만 발현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빛을 받는 면의 색상이 그림자가 드리워진 부분보다 언제나 더 밝을 것이라는 믿음 아래, 사실상 동일한 채도를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지각의 오인은 합리적으로 작동하는 지각 과정만큼이나 체계화되어있다.



2. 체계적 비합리성


체계적 비합리성을 조금 더 전체론적인 관점에서 긍정적으로, 다시 말해 ‘인간적으로’ 재맥락화할 수도 있다. 정보가 부재하는 곳에 경험적 데이터를 자동적으로 채워 넣는 지각의 작용을 상상력의 힘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추상적이고 무작위한 패턴 이미지 속에서 특정한 형상을 인지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그 형상을 보지 않는 것이란 불가능하다. 설령 그 형상이 제거된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녀가 떠났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에 대한 기대는 그녀의 자리에 남아 있다. [...] 자동적 기대,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억제할 수 없는 기대"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글의 첫 번째 관심사가 등장한다: 잘못 보거나, 없는 것을 보는 일은 주어진 사태가 어떠어떠할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에 영향을 받는다. 그렇다면 듣는 일에 있어 이러한 '자동적 기대'가 미치는 영향은 어떨까? 언뜻 생각하면 무언가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그것을 보게 하는 것처럼, 무언가를 듣고 싶다는 마음이 그 소리를 듣게 할 것만 같다. 다른 감각적 경험이 그렇듯, 소리를 잘못 듣는 일 또한 소리가 들려오는 상황에서 내가 가지는 기대감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또한 사실이지만, 동일한 방식으로 그렇지는 않다. 


그렇다면 잘못 보는 일과 잘못 듣는 일은 어떻게 다를까? 어떤 사태를 두고 제기된 서로 다른 가설들이 주어진 증거들을 동등하게 만족하고 있다면, 가설들의 우위를 결정할 수 없다. 이를 가설 선택(이론 결정)의 문제라 부르기도 한다. 잘못 보는 일, 예컨대 착시 현상이 특정한 방식으로 보도록 정향된 광학적 데이터의 배열로 인해 일어날 때, 눈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생각하는 그대로가 아니라는 사실을 ‘듣기’ 전까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관점을 전환하는 순간 언제든 눈앞의 오리는 토끼가 될 수 있으며,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나 잘못 듣는 일은 꼭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지금 듣고 있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그러한 소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별로 그럴듯하지 않은 가설을 폐기하지 못하는 상황과 더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때 소리에 대한 믿음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그리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전환되기보다는, 하향 배음(subharmonics)을 구성하면서 동시에 발생한다.


[그림1] 최선 청각 추론의 곡선적합(Curve Fitting)


그래프 위 임의의 점들을 증거라 하고, 특정 상황에서 주어진 증거를 모두 지나는 선을 가설이라 한다면, 원리상 주어진 점들을 모두 지나가는 여러 다른 선, 즉 가설들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경쟁하는 이 가설들은 동시에 참일 수 없다. 게다가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가 제한적이기 때문에 이 중 어느 것이 참인지 판단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참을 판단할 한 가지 방법은 ‘최선의 설명에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 IBE)’으로, 제안된 가설이 사실일 경우 가장 그럴듯한 것을 채택하는 것이다. 


종종 가추법(abduction)으로 불리기도 하는 IBE의 핵심은, 그 방식이 참의 보증과 무관하다는 사실이다. 가설의 그럴듯함은 이른바 인식적 정당성과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어진 가설이 옳은지 그른지 사후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경우, 가설 채택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 먼저 가설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실제로 사실이라면 그것은 진짜 양성(true positive, TP)이고, 채택한 가설이 틀렸다면 거짓 양성(false negative, FN)이다. 반대로 가설을 거부했는데 실제로도 그 가설이 틀린 경우는 진짜 음성(true negative, TN). 마지막으로 우리가 거부한 가설이 사실은 옳은 것으로 드러날 때, 그것은 거짓 음성(false negative, FN)이다.


새벽녘 창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올 때, 깜깜한 어둠과 그 밖의 제약으로 인해 우리는 여러 가능성들 중 어느 하나가 특별히 더 그럴듯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사태에 대한 믿음은 가장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이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을 잠식하는 만큼에 비례하여 점점 더 그럴듯해진다. 물론 그 소리는 다른 소리일 수도 있지만, 그건 지금은 알 수 없다.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둠 속에서 일어나는 음향적 사태를 설명하는 가장 그럴듯한 가설을 선택하여 믿는 일을 '최선 청각 추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3. 그럴듯한 현재


최선 청각 추론은 증언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데, 이 점이 글의 두 번째 관심사다. 일차적으로 P/N을 판단하는 것이 소리(증언)를 통한 앎이고, 이차적으로 그 판단의 T/F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봄(증거)을 통한 앎이라면, 증언적 믿음에 있어서 '거짓 양성' 또는 '거짓 음성'을 판정하는 일은 원리상 불가하다. 진단(또는 추론)이 최종적으로 맞는지 틀리는지 판단할 수 있는, 즉 귀무가설을 기각하거나 받아들이도록 하는 검증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청취자가 사태 이전에 가지고 있던 사전 믿음을 증언을 통해 갱신한 사후 믿음만이 유일한 앎의 기반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가시적인 증거가 아니라, 청취자의 주관적 합리성이다. 이것은 때때로 그 실체조차 모호한 객관적 합리성과의 대비 속에서 폄훼되곤 한다. 그러나 증언과 반증의 교차 지점에서 매듭지어지는 것은 숨겨진 진실이 아니라 그럴듯한 현재(specious present)일 따름이다. 증언자들이 과거의 다를 수 있었을 가능성을 폭로하는 순간, 불신자는 “그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외친다. 이에 증언자는 다시금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응한다. 모두가 자신의 말이 사실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사실들은 서로 양립 불가능하다. 모두가 다른 과거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2] 증언과 반증의 결절점에서 발생하는 그럴듯한 현재

(~T: 반증, SP: 그럴듯한 현재, T: 증언)


이러한 상황에서 증언에 대한 믿음을 감수하는 일을 어찌 도박에 뛰어드는 일에 비유하지 않을 수 있을까? 주어진 과거에 대한 양립 불가능한 가설들의 경합은 바닷가에 세워진 모래성을 잠식하는 파도처럼 공통의 과거("역사")를 박살 낸다. 증언과 반증은 각각 파도의 마루와 골이 되어, 어느 순간 무엇이 먼저 시작되었는지를 분간하는 것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다. 피해자 보호/연대/동일시의 이름 아래, 증언된 바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을 원천 봉쇄하고, 과거("어제") 그 자체를 구식화해야만 미래("내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손쉬운 진보관은 이 곤란을 더욱 악화시킨다. 그러나 증언에 대한 믿음이 윤리적 동인이 아닌 실용적 참의 선택에서 발생한다는 관점 아래서, 과거의 다를 수 있었을 가능성은 미래의 그것만큼이나 열려있다. 당연하게도, 과거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투쟁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살지 않은 타인의 삶에 관한 증언을 억압된 목소리의 복원이라는 명분 아래 의심 없이 믿든, 아니면 자기 입맛에 맞게 조작된 허구로 취급하든, 어떤 패를 내도 지는 게임. 믿거나 말거나, 이 게임은 단순히 믿음 또는 불신이라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두 가지 믿음은 동시에 발생한다. 나는 풍문처럼 들려오는 증언을 n%만큼 불신하고 (100-n)%만큼 신뢰할 수 있다. 함께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믿음이 함께한다. 이런 공존은 증언자의 기억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조작되었거나, 아니면 증언자가 가지고 있는 앎이 운 좋게 얻어진 참일 수도 있다는 회의주의적 논변에 기대지 않더라도 늘상 일어난다. 오히려 참의 토대를 요구하는 인식적 정당화의 과정은 증언이 거짓일 수 있는 미미한 가능성을 언제나 놓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종종 도저히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을 상상하게 하는데 이런 과정의 이점은 엉뚱한 곳에서 발견된다. 바로 상상 가능성(conceivability)을 도착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여지이다.


최선 청각 추론은 지금은 알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만이 중요한 경우에 불가피한 것으로 드러난다. (결코 종점에 이르지 않기 때문에) 이러쿵저러쿵 회고될 수 없는, 그리고 일어난 사태가 여전히 증거로 환원될 수 없는 바로 그때, 당신의 가설 선택은 무언가 대단히 꺼려지는 가능성에 대한 상상으로 과적합 된다. 여기서 가장 꺼려지는 가능성이란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이 위증일 가능성이다. 모의 위증에 대한 공포는 증언-듣기의 공포 그 자체가 된다. 단지 거짓 양성과 거짓 음성을 구분할 수 없다는 이유로 주어진 상황에 가장 유용한 가설을 일단의 진실로 간주하는 순간, 당신은 인식적 참이 아닌 실용적 진리를 채택하고 있다. 실용적이고 경험적인 요건에 의거해 하나의 음향적 가설을 선택하는 상황은 상상 가능성을 확장하는 다른 방법이 될 수 있다. 요컨대,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을 상상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일의 전조 증상일 뿐 아니라 차라리 전제 조건일 수도 있다고까지 주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무언가 상상하기 꺼려진다는 것은, 이미 그것이 상상되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위해 믿음을 욕망으로 바꾸어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욕망을 꺼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무언가를 꺼린다는 것은 이미 그것을 생각/상상/욕망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욕망의 발명이 종종 욕망하기 꺼려지는 것의 변주로부터 출발하듯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의 상상 또한 상상하기 꺼려지는 것의 상상으로부터 도움닫기 할 수 있다. 믿음과 욕망의 또 다른 공통점은 그것을 선택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믿기로 선택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을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듣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상상하고 싶지 않은 것의 상상이 상상할 수 없는 것을 위한 포털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가설'은 이 지점에서 제안된다. 이 가설에서는 객관적 합리성보다는 주관적 합리성이, 인식적 진리보다는 실용적 진리관이 대두된다. 이런 가설은 매우 사변적으로 들리지만, 이것을 채택하거나 거부하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보잘것없는 우리의 인간적 경험, 그리고 제한된 합리성에 의지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는 동시에 소리를 잘못 듣는 경험을 인지적 착오, 환청 또는 정신적 착란의 결과라고 일축하거나, 아니면 유령의 간계라고 말하는 방식 말고 다르게 말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후에 밝혀지는 바와 다를 수도 있는 현재의 음향적 사태에 관한 믿음은 다르게 듣는 일이 가지는 이상한 가능성의 핵심이다.


추신. 

나를 해칠지 모르는 포식자의 존재를 암시하는 소리를 찾기 위해 굳이 집을 벗어나 숲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다. 만약 당신이 창문이 부서진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날이 찾아온다면, 새벽녘 창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어떤 침입자의 발소리라고 착각할 수 있다. 두려움에 떨다가 다음날 그것이 간밤에 내린 소나기 소리였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당신은 안도한다. 이렇게 우리는 다가오는 미래의 곡조에 대한 믿음이 실현될지, 아니면 배반될지 점친다. 임박해오는 사건이 마침내 벌어졌을 때, 즉 100갈래로 튄 스파크 다발 중 마침내 하나가 점화될 때, 나머지 실현되지 않은 가능성들은 영원히 봉인되고 고조되던 기대는 급격한 하강 국면을 맞는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녀가 떠났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녀의 존재에 대한 기대는 그녀의 자리에 남아 있다. [...] 자동적 기대,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억제할 수 없는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