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XXIII

영감의 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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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창작을 위한 연구라는 명목 하에 상식 수준의 인용 표기도 누락하는 일은 점점 더 빈번해지고 있다. ‘작품의 영감’이 된 ‘레퍼런스’를 짜깁기하는 것을 ‘인용 다꾸’라고 부를 수 있다면, 나는 어제도 그것을 보고 왔다. 지난 달에도 봤다. 물론 작품을 위한 연구라는 것은 학술적 용도로 좀처럼 포섭될 수 없지만(일단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연구 과정에서 얻어진 지식이 ‘아티스트 스테이트먼트’나 작업적 ‘영감의 원천’으로 소진되어도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치 이것이 작업을 위한 연구의 일환이기 때문에, 정확한 인용의 표시라는 부담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오인이 생기나본데, 그 결과 많은 스테이트먼트나 작업 노트가 특정 담론이나 저자, 아니면 최근 출간된 무슨무슨 출판사의 번역서로 특정됨이 분명한 문장과 사유를 인용 없이 사용하고, 또 인용을 적시하더라도 어떤 구체적인 동기 또는 이해를 바탕으로 하기보다는, 영감의 원천으로서 그렇게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요즘 작가’들이 ‘스스로의 생각이 없고’ ‘어디서 본 말을 반복한다’는 식의 진술은 진짜 문제를 가린다. 그냥 출처 표기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그런 상식 수준의 합의가 지켜지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 창작의 논리에서, 그런 종류의 합의는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맞기도 하다. 그것이 아마 학술 연구로 소급되지 않으면서도, 또는 비평이라는 이름의 연대기적 서술자의 지위를 자처하지 않으면서도, 창작자 수준에서 가능한 한 최선의 엄정함을 갖춘 연구의 외연을 넓히는 작업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려면 텍스트가 “영감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된다. / 2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