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혀의 믿음

* 매체와 툴파맨시: 기이한 신비주의와 매체의 접속_ 류한길 대담 원고

(<열 한번의 주문>, 돈키호테 콜렉티브 기획,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정보원 극장3, 2021. 10. 16)



우선 매체라는 단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계신지를 제 나름대로 정리해보고 싶었습니다. 기술을 뜻하기도 하고 마법을 뜻하기도 하고. 여하간 매체를 수송비나 기반 시설, 나아가 한 객체의 주기가 시간적 경과에 따라 겪는 다양한 변화의 관점으로까지 확장하는, 여러 이유로 선호될만한 유물론적 접근과는 다른 관점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단 툴파 자체가 질료 없이 형성되는 상념체이죠. 그렇기 때문에, 정신적 합성물로써 툴파가 예기치 못한 오작동을 일으키고 불편함을 초래한다고 할 때, 그 문제는 물리적이고 질료적인 부분에 대한 고려를 추가하는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해결되지 않는가 생각해보면,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그 실재적 존재 가능성을 주장하는 문제와도 연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허구적 대상이 어떤 가능 세계에서 피와 살을 지닌 구체성을 지니고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대체로 받아들일만하지 않다고 여겨지는 듯 합니다. 허구적인 이름과 그것이 포함된 문장은 대체로 어떤 인간적 관습이나 이해, 동의를 거친 ‘꾸며내기’ 또는 ‘믿는 척 하기’를 통해 기능한다고 보는 접근이 허구주의라고 불리우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허구적 대상은 오직 ‘내포적 연산자'를 통해 해명, 부연, 괄호치기 되어야만 기능할 수 있는데요. 가령 그런 문장은 “보르헤스의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에 따르면~"과 같은 형식으로 발화됩니다. 그러니까 그 연산자를 올라타서, 그것을 운반자 삼아서만 움직일 수 있다고 보는 것인데요. 만약 그런 연산자 없이도 허구적 대상이 스스로 돌아다닐 수 있다고 말한다면 세계 속에서 너무 많은 존재자, 또는 도저히 있을 법 하지 않는 존재자를 인정해야만 하는 존재론적 부담을 지게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확실히, 스스로 생산한 허구에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허구적 대상을 기술하지 않을 때 어떤 공백이 발생하고, 그게 누적되어 ‘분리 주기’를 만들어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현재가 다시 어떤 결합주기로 향해가는 과정에 있다면, 허구를 기술하는 다른 방식이 필요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그건 질료적인 부분에 대한 고려를 추가하는 방식으로는 가능하지 않죠. 그에 따라, 유한한 정신이 허구와 그것들의 모든 가능한 집합을 감당하거나 실현할 수는 없을지라도, 잠재적 차원, 혹은 봉인된 차원에서는 가능하다고 보는 온건한 방식의 무한론이 제안됩니다. 물론 이런 입장도 허구적 실재론이 마주하는 문제와 동일한 문제를 겪겠지만. 그 실재화의 가능성이 잠재적이든 그렇지 않든, 내포적 연산자 없이, 그러니까 믿는 체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걸 봉인하지 않는 방식으로 허구적 대상의 실재적 존재 가능성을 인정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요. 내포적 연산자를 제거하는 대신 남용하는 방법도 생각납니다. “~에 따르면”, “~에 의하면"으로 점철되어있지만 원전이 존재하지 않거나 비틀려있는 방식이겠네요. 악명높고 유서깊은 방법입니다.


체계적 비합리성

미래를 예측하는 행위에 있어서, 그 예측이 꿈 속에서 보았거나 주술사의 점괘를 통해 알게 된 것이라면 대체로 합리적이지 않다고 여겨지곤 합니다. 예지몽이 거의 틀림 없거나, 점괘가 사후적 확률을 꽤 잘 보증하는 경우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다른 이를 설득할 수 없으면 미신 취급을 받습니다. 합리성의 종류를 구분해보자면, 잘 맞는 예지몽이나 점괘는 그것을 믿는 이의 주관적 합리성을 구성할 수는 있지만 믿는 이로부터 객관적 합리성의 조건은 만족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기계 학습은 객관적 확률이 아닌 주관적 확률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확률화된 주관성의 되먹임이 툴파의 개별성을 보증하게 되는 것은 목적의 실현이 아닌가 합니다. 


그렇기에 진정 ‘스스로 실현하는 믿음’이 문제라면, 어떻게 다른 이들에게 말도 안되는 말을 납득시킬 것인가에 관한 문제가 생겨납니다. 특히 미래가 잠정적인 기대치 또는 주관적 사전 확률로 접근될 수 밖에 없을 때, 과거를 참조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거조차도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과거가 미래보다도 오히려 더욱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저는 최근에 증언에 관해 생각하면서 갖게 되었습니다. 이때 증언이라는 표현은 법정에서의 진술이나 종교적 증언이 아니라, 다른 이로부터 어떤 것을 전해듣고 자신의 믿음을 구상하는 앎의 사건을 포괄하는 넓은 의미에서 사용됩니다. 


어떤 사실을 믿을지 말지 선택한다고 할 때 믿거나 믿지 않거나 둘 중 하나로 수렴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반 쯤은 믿고 반 쯤은 의심하는 섞인 상태가 대부분입니다. 툴파의 용례를 살펴보려고 알렉산드라 데이비드 닐의 <티베트 마법의 서>를 보니, 수많은 증언적 경험담들이 들어있었습니다. 툴파는 시체를 일으켜 세우는 롤랑(rolang)이나, 자신의 복체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원거리에 있는 다른 시신에 깃들게 하는 롱주(trong jug)와 다르다는 점 등을 알게 되었는데요. 그밖에도 책은 시체가 살아 움직이거나 물체에 상념이 깃들거나 상념이 물질화 하는 이야기들로 가득했습니다. 또 많은 경우, 그런 믿기 힘든 이야기들은 저자가 직접 경험한 것도 있었지만, 저자가 여행중에 다른 이들로부터 전해들은 것을 재증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례로 롤랑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방 안에서 스님이 시체에 입을 포개고 기도를 하다가, 시체가 살아나면 즉시 혀를 물어뜯음으로써 시체를 조종하게 되는 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데요. 데이비드 닐조차 롤랑을 직접 실행한 스님의 이야기가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뜯은 혀를 아직 가지고 있냐고 물었더니 서랍 속에서 잘린 혀를 꺼내어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저 까맣고 말라비틀어진 어떤 조각이었을 따름이기에, 그것이 혀였을 것이라고 상상하기 힘들었다고 하네요.


흔히 어떤 이상한 이야기를 믿을지 말지를 선택하는 것은 듣는 이의 내성적 판단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책을 다시 서가에 꽂아 넣고 음산해진 기분을 털어낼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 말들을 말 그대로 믿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가 어떤 것을 믿기로 선택한다고 해서 믿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어떤 것을 더 이상 믿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해도 마음 먹은대로 되지 않기도 하고요. 흔히 믿음은 의지적이고, 충동이나 욕망은 비의지적이라고 생각되는데, 믿음조차도 욕망처럼 통제가 어려운 영역에 있을 수 있습니다. ‘믿는 척'은 할 수 있겠지만요. 저는 선생님께서 종종 하시는 충동에 관한 이야기도 믿음에 관한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음모론 견디기

만약 증언자가 거짓말쟁이인지 아니면 진실한 사람인지를 아는 것, 즉 증언자의 과거를 아는 것보다 증언자와 청자인 나 사이의 관계가 진리에 더 기여한다면, 어떤 증언자의 과거 이력을 살펴보는 것이 증언의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문제가 있는데 결국 어떤 진리가 간주관적으로만 확증되는 것이라면, 인식을 위해 분투하는 노력이 쓸모 없게 됩니다. 반대로 다시 내성적으로 판단된 합리성을 진리 판별의 조건으로 도입하게 되면 간주관성은 궁극적인 진리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하는 잉여적인 조건이 되고요. 이러나 저러나 둘 다 세계의 여타 존재자들을 파악하기 적절치 않다고 파산 선고를 받은 인간중심적 합리주의의 산물인 느낌인데요. 저는 오히려 여기서 시작할 필요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증언을 믿는 일이 발생시키는 인식적 문제가 허구를 믿는 일에서 발생하는 인식적 문제와 유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진리는 신뢰와 의심 둘 중 하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둘 다에 의해 확률적으로 지탱됩니다. 하지만 과거의 사실들 즉 우리가 어느 시점에서는 타인의 증언에 의지해서만 구성할 수 있는 믿음들에 관한 의심을 극단적으로 밀어부치면, 우리는 우리가 몇 날 몇시에 태어났다고 부모가 말해준 우리의 생일 조차도 믿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화성인이 전파 무기를 사용해서 우리의 기억을 어떻게 해버렸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식의 음모론으로 곧잘 이어지는 회의주의는 매우 기피될만한 것이지만, 회의주의를 작동시키는 다양한 반사실적 사고실험은 결정론을 거부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됩니다. 


고대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상상을 실재로 전환했는지 그 변환의 매커니즘이 현재의 우리에게 알 수 없는 것 또는 번역될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다면, 어쩌면 회의주의의가 충분히 실험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것이 끝난 것 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실은 0을 향해 무한소적으로 지속하고 있다고 이야기할 때, 그것이 정확히 어떤 부패 또는 변성 과정을 거치는지 자세히 기술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고 능력이란 당대에 주어져 있는 환경과 정보에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고 능력의 자체의 높고 낮음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말은 굉장히 회의주의적인 접근으로 보입니다. 과거라는 대상 자체를 일종의 ‘신뢰할 수 없는 보고자 집단'으로 여기는 태도라고 할까요? / 202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