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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론을 위한 고려사항" 소책자

전시 전경(사진: 양승욱)

<증언론을 위한 고려사항> 소책자

근거가 없다는걸 알면서도 미래에 대한 예언에 의지하듯, 증언자의 과거를 잘 알지 못함에도 그 말을 믿기를 선택한다. 때로 그 말이 앞뒤가 안맞고 부서진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더라도 말이다. 납득 가능한 연속성이 포기된 자리에 비로소 믿음이 들어선다. 따라서 믿음은 포기의 형태이다. 포기는 믿음-사건의 조건이다. 이 사건-조건은 듣는 이의 적절한 인식 능력(청력)이나 노력, 덕, 또는 합리적 판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만약 우리가 증언을 통한 앎의 문제를 ‘듣는 능력’이나 ‘듣는 노력’과 결부시키면서 여전히 감각이 진정한 앎을 산출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다면, 듣고 보는 문제는 결국 행위 능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하지만 우리가 특정 구간에서 듣기에 대한 ‘노력’을 덜 하거나, 듣기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방 안에 숨겨진 행위자가 당신에게 이상한 믿음을 주입시키고 있을 수 있다···.

이 작업은 <다정한 침해>(노뉴워크 기획, 공간 일리 후원, 2021.12.7-22)에서 보다.

Just as you rely on predictions made about the future despite knowing there is no basis for it, you choose to believe the testifier's testimony even though you haven't experienced what she has gone through. Even if the words sometimes consist of incoherent and broken sentences. The only condition for a belief to arise is your abandonment of acceptable, cogent continuity. So belief is a form of giving up. Abandonment is a condition for a belief-event to happen. This event-condition has nothing to do with the listener's appropriate cognitive ability(hearing), effort, virtue, or rational judgment. If we still associate the knowledge from testimony with 'the ability to listen' or 'the effort to listen, still asking if our senses do produce 'true knowledge, the problem of listening/seeing eventually ends up as a matter of agency. However, it is not that we can't listen because we make less 'effort' in listening, or have less 'ability' in listening. Rather, the hidden agent in the room may be instilling you with a weird belief···.